
서론: 내가 고른 오늘 아침의 옷, 정말 '나의 선택'이었을까?
우리의 일상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다. 아침에 일어나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고, 점심 메뉴로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며, 퇴근길에 지하철을 탈지 버스를 탈지 기로에 선다. 우리는 이 모든 과정에서 발생하는 결정이 온전히 나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나 역시 오늘 아침, 옷장 앞에서 날씨와 기분을 고려해 셔츠를 골라 집어 들면서 그것이 나의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점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원해서 골랐고, 내가 팔을 뻗어 입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내린 이 모든 당연한 선택들이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진 시나리오에 의한 것이라면 어떨까? 스탠퍼드 대학교의 세계적인 신경과학자 로버트 새폴스키는 저서를 통해 인류 문명의 근간을 흔드는 도발적인 선언을 던진다. 그는 700페이지가 넘는 압도적인 데이터를 통해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행동은 생물학적 유전과 환경적 요인이 빚어낸 정교한 결과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단순히 과학적 사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유의지가 거세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타인을 이해하고 사회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지에 대한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본론 1: 1초 전부터 수만 년 전까지의 인과관계
새폴스키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근거는 치밀하고 다층적이다. 그는 인간의 특정 행동이 일어나는 순간을 기점으로 시간을 역추적한다. 행동이 일어나기 1초 전, 뇌의 편도체와 전두엽에서는 어떤 신경전달물질이 오갔는지 분석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몇 시간 전의 호르몬 수치, 며칠 전 겪었던 스트레스 사건, 그리고 수십 년 전 유년기의 양육 환경이 뇌의 구조를 어떻게 형성했는지 추적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유전자와 후성유전학,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처했던 문화적 환경과 수만 년에 걸친 진화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국 지금 내가 내린 '결정'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 결과라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문득 나의 일상이 스쳐 지나갔다. 오전 내내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을 다 끝내지 못했다는 부채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가 하원한 후, 평소라면 웃으며 넘겼을 아주 사소한 장난에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짜증을 내뱉고 말았다. 당시에는 내 감정 조절의 실패라고 자책했지만, 새폴스키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짜증은 그 순간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오전의 스트레스로 인해 높아진 코르티솔 수치, 전날의 수면 부족, 그리고 유년 시절부터 형성된 나의 심리적 방어 기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터져 나온 필연적인 결과였던 셈이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었던 것들의 총합이며, 인과관계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자아'가 개입할 틈새는 어디에도 없음을 통감하게 된다.
본론 2: 운의 불평등과 도덕적 책임의 재해석
이 책에서 가장 파격적인 지점은 '능력주의'와 '책임'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가 흔히 누군가의 성공을 노력의 결실로 찬양하고, 누군가의 실패를 의지 부족으로 비난하는 태도가 생물학적으로는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새폴스키의 관점에서 보자면, 뛰어난 자제력으로 성취를 거둔 사람은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뇌 구조와 환경을 '운 좋게' 타고난 것에 불과하다. 반대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 역시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도록 결정된 뇌와 환경의 희생자일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저자는 이를 간질 환자에 비유한다. 과거에 간질 발작을 마귀가 들린 것으로 여겨 처벌했던 시대가 있었으나, 이제 우리는 그것이 뇌의 전기적 이상임을 안다. 새폴스키는 현대 사회가 범죄자를 '악한 의지'를 가진 존재로 비난하는 것 역시 미래에는 이와 같이 미개한 일로 기억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는 형벌 시스템의 존재 이유를 죄에 대한 '응징'이 아닌, 사회 안전을 위한 '검역과 관리'의 차원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제안으로 이어진다.
물론 필자에게는 저자의 이러한 시각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운 지점이 있다. 간질은 명백히 의학적으로 증명된 이상 반응이지만, 반인륜적인 범죄를 단순히 '생물학적 불운'이라는 방패 뒤로 숨기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범죄자를 향한 원색적인 비난과 응징에만 몰두하기보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사회 안전을 위해 위험 요소를 철저히 '검역'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차원으로 사법 체계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깊이 공감하게 된다. 이는 가해자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과학적이고 근본적인 방식으로 사회 시스템을 보호하려는 시도로 읽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도덕적 결함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생물학적 불운의 결과일 수 있다는 통찰은 독자에게 거북함과 동시에 깊은 성찰을 안겨준다. 우리가 가진 정의감이 과연 공정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 끊임없이 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본론 3: 자유의지가 없는 세상은 허무한가?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은 자칫 허무주의나 숙명론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노력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새폴스키는 단호하게 답한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곧 '변화가 불가능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뇌는 가소성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정보와 환경적 자극에 의해 끊임없이 변한다. 비록 그 변화의 과정조차 인과관계의 산물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배우고 성장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다만 그 동력이 나의 '위대한 의지'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입력된 '새로운 정보'와 '경험' 덕분임을 인지해야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에 대해 진정한 의미의 공감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타인의 과오를 비난하기보다 그가 처했던 맥락을 먼저 살피게 되고, 나의 성취를 뽐내기보다 내가 누린 행운에 대해 겸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결정론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따뜻하고 관대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결론: 겸손과 관용을 위한 새로운 지평
로버트 새폴스키의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는 필자에게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방대한 과학 전문 용어와 때로는 냉소적일 정도로 단호한 논조가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주는 울림은 매우 깊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나의 주권에 의문을 던짐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더 높은 차원의 인도주의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비난에서 이해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한 과학 서적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타인에 대한 무한한 관용을 배우게 하는 철학서에 가깝다.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완전히 바꾸고 싶은 독자라면, 방대하지만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나의 사소한 짜증조차 거대한 인과관계의 일부였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향해 조금 더 부드러운 숨을 내쉴 수 있게 될 것이다.
'도서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도서 리뷰] 내 아이에게 물려줄 가장 값진 유산(하이엔드 아비투스-박치은 저) (0) | 2026.04.23 |
|---|---|
| [도서 리뷰] 7살 아이 엄마가 선택한 시간 쪼개기의 기술(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신영준,고영성 공동 집필 저) (0) | 2026.04.19 |
| [도서 리뷰] 전업주부의 자기계발, '나'를 잃지 않으면서도 '가정'을 지키는 균형의 기술(행동하지 않으면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브라이언 트레이시 저) (1) | 2026.04.16 |
| [도서 리뷰] 매일 핸드폰만 보던 육아 일상, 이 책 한 권으로 도서관 루틴이 생겼다(루프-이승후 저) (0) | 2026.04.13 |
| [도서 리뷰] 30대 육아맘의 불안을 치유한 괴테의 문장들 (괴테는 이미 모든 것을 말했다-스즈키 유이 저) (1) | 2026.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