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청춘의 색깔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대개 화사한 오렌지빛이나 싱그러운 초록빛을 떠올린다. 하지만 싱어송라이터 한로로의 첫 단편소설집 『자몽살구클럽』은 이러한 보편적인 환상을 서늘하고도 다정하게 깨뜨린다. 음악을 통해 불안한 청춘을 위로한 그녀는, 이제 3분의 멜로디 대신 정교한 문장을 선택해 자신만의 세계관을 확장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앨범 제목같아 신기했고, 앨범 속 노래 제목 하나하나가 꼭 소설의 챕터 제목처럼 느껴졌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과정은 이 책을 즐기는 또 다른 이유였다.이 책은 단순히 유명 뮤지션의 화제성에 기댄 작품이 아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작가 특유의 필체로 우리 사회가 애써 외면했던 어두운 구석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앨범 속 노래 제목들이 소설의 각 장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을 발견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사회의 이면을 파고들면서도 끝내 '다정함'이라는 구원을 놓지 않는 이 소설의 쌉싸름한 매력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쌉싸름한 자몽의 맛: 우리가 외면했던 청춘의 진짜 얼굴
소설의 제목에 등장하는 '자몽'은 청춘의 이중성을 상징하는 완벽한 장치다. 자몽은 겉보기에 상큼하고 예쁜 색감을 지녔지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혀 끝에 감도는 강렬한 쌉싸름함을 피할 수 없다. 한로로 작가는 이 맛을 빌려 우리 사회 청소년들이 마주한 쓰디쓴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작품 속 주인공들인 소하, 태수, 유민, 보현은 각자 감당하기 버거운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가정 내 폭력, 숨 막히는 성적 지상주의,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일어나는 소외,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까지. 작가는 이들의 고통을 흔한 '방황'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대신 어른들이 설계한 견고한 사회 시스템이 어떻게 아이들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는지 아주 섬세하고 날카로운 문장으로 가감 없이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아이들을 '빛나는 꽃'이라 부르지만, 그 수식어 뒤에는 밤마다 홀로 삼켜야 했던 비릿한 눈물들이 숨겨져 있다. 작가는 자몽의 붉은 색감을 통해 이 어두운 단면을 시각화하며, 우리가 과연 이들의 진짜 목소리를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묻는다. 외면해왔던 쌉싸름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이 독자에게 건네는 첫 번째 메시지다.
2. '살구' 싶은 간절함: 절망의 끝에서 서로의 손을 잡는다는 것
소설 중반부를 넘어가면 아이들이 결성한 비밀 모임 '자몽살구클럽'의 진짜 의미가 드러난다. 여기서 '살구'는 단순히 과일 이름을 넘어 "나 정말 살구(살고) 싶어"라는 아이들의 절박한 소망을 담은 중의적 표현으로 읽힌다. 죽음을 고민하며 모였던 아이들이 역설적으로 서로를 통해 삶의 의지를 발견하는 과정은 깊은 울림을 준다.
이 대목은 사회적 위로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대개의 사회 시스템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열심히 해" 혹은 "나아질 거야"라는 식의 해결책만을 강요한다. 그러나 클럽 멤버들이 나누는 위로는 결이 다르다. 그들은 서로의 불행에 점수를 매기지 않으며, 그저 곁에 앉아 침묵을 공유하거나 "나도 그랬어"라는 공감을 건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연대의 힘이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공유될 때, 차가웠던 세상에는 작은 살구빛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타인의 상처를 섣불리 고치려 들지 않고 아물 때까지 곁을 지켜주는 다정함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생명의 끈이 된다. 무채색의 절망 속에서도 개인이 개인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결국 조건 없는 연대뿐임을 작가는 이 살구빛 서사를 통해 절실히 증명한다.
3. 무채색 세상을 바꾸는 작은 다정함: 우리 모두를 위한 위로
『자몽살구클럽』의 끝이 완전한 해피엔딩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다. 소설 밖 현실은 여전히 차갑고 아이들이 돌아가야 할 세상의 구조적 모순은 견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변화는 클럽을 거쳐 간 아이들의 마음속에 '자신만의 색깔'이 생겼다는 점에 있다. 무채색으로 죽어있던 세상이 누군가와 함께 칠한 자몽색과 살구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로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묵직한 숙제를 던진다. 주변 어딘가에서 홀로 자몽의 쓴맛을 삼키고 있을 또 다른 소하와 태수들에게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어줄 것인가를 묻는다. 사회적 약자나 소외된 청춘들의 아픔을 뉴스 속 일회성 소모품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할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지 질문하는 것이다. 거창한 사회 개혁만큼이나 당장 내 옆 사람에게 건네는 따뜻한 시선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살구 싶은' 이유가 될 수 있음을 책은 강조한다.
한로로의 노래 〈비틀거릴지언정〉의 가사처럼, 우리 모두는 조금씩 비틀거리며 생을 이어간다. 이 소설은 그 비틀거림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오히려 그 걸음걸이가 서로를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다고 토닥인다. 삶이 너무 무겁고 어둡게 느껴지는 날, 혹은 세상에서 혼자 떨어진 섬처럼 느껴지는 날에 이 책을 펼쳐보길 권한다. "너의 슬픔은 틀리지 않았어"라고 속삭이는 자몽살구클럽 멤버들의 목소리가 읽는 이의 마음에도 깊이 닿기를 바란다.
한줄평: 청춘의 시큼하고 떫은 맛조차 아름다운 무늬였음을 증명하는 기록.